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신기오로 이힌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1833년 [[도광제]]의 [[몽골]] 출신 [[후궁]]인 [[효정성황후|정귀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함풍제|혁저]]가 모친인 [[효전성황후]]를 잃은 후 정귀비의 손에 자랐기에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지만, 청소년기에는 차기 대권 다툼으로 인해 라이벌 의식이 다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혁흔은 어릴 때부터 [[제1차 아편전쟁]]으로 아버지 도광제가 수모를 겪는 일에 울분을 쌓아 자라면서도 청나라가 서양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져 있음을 냉정히 인식하며 각종 서양의 신문물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제왕학]]의 근본인 유학이나 무술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이며 일찍부터 차기 황제감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혁저는 스승의 조언으로나 스스로 느끼기로나 동생보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임종을 앞둔 [[도광제]]에게 혁흔이 [[청나라]]의 국정 현안에 대해 물 흐르듯 읊은 것과 달리 아버지가 아프신 것은 자식의 죄라며 일종의 감성팔이(?)를 시전하여 덕치, 인치를 실현할 황제감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결국 도광제 승하 후 건청궁에서 유조를 확인한 결과, 혁흔은 친왕에 봉하고 혁저를 황태자로 봉한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후계자를 지명하는 공문서인 건청궁 유조에서 다른 황자를 일부러 황제 다음가는 친왕에 봉하는 예는 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예는 강희제가 황4자 윤진에게 자신이 유폐시킨 황태자 윤잉에 대한 죄책감으로 윤잉의 가족들을 잘 챙겨주라 당부하고 옹정제가 유언대로 윤잉의 가족들도 잘 챙겨준 것밖에 없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아비의 허물을 황족 자녀들에게까지 연좌하지는 말라는 (누르하치와 슈르하치 시절부터 이어진 집안 전통에 따른) 뜻이었을 뿐 황8자 윤사나 티베트에 나가있던 황14자 윤정에 대한 조치까지 강희제가 일부러 못박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도광제의 후계자로 혁흔이 아닌 혁저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함풍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